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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석제 '다산' 인장

石製 茶山 印章

  • 유물번호

    창덕7801
  • 연대

  • 재질

    석인
  • 크기(cm)

    가로:1.8, 세로: 1.6, 높이: 2.4

첨부파일 :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

국립고궁박물관이 창작한 석제 '다산' 인장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서체: 한인전(漢印篆)
사용자: 정약용

인장은 사용자의 신분이나 신용을 나타낸다. 조선왕조의 인장은 국새나 관인 등 국가업무용 인장, 왕과 왕비의 존업성을 상징하던 어보(御寶)를 비롯하여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던 사인(私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인은 인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 여유당(與猶堂) 등이다. 1789년 대과에 합격한 후,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왕의 학문 정진과 개혁을 도왔다. 그러나 정조의 사망 후, 천주교 신앙을 빌미로 강진(康津)에서 1801년부터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경세유표(經世遺表)》 · 《목민심서(牧民心書)》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정약용은 철학 · 경학 · 시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분야 등 여러 방면에 뛰어났으며, 서화에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역대 서가들의 글씨에 대한 감평(鑑評)을 남기는 등 서예에 대한 식견이 있었던 그는 석고문(石鼓文)을 보고 전서(篆書)를 쓸 정도로 글씨에도 재능이 있었으며, 전각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다산"은 정약용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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