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통합예약
전시 상설전시 과학문화

과학문화

  • 과학문화

    조선시대에 과학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보이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다. 국왕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해 천문, 농업, 의학, 무기제조 등 과학기술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천문학天文學은 제왕의 학문으로 여겨졌다. 하늘의 여러 현상을 살펴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는 천문학을 통해 백성들이 때에 맞춰 농사를 짓고 생업에 힘쓰게 했으며 국왕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드러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국왕은 중국 천문 과학기구와 역법曆法을 연구하고 이를 조선 실정에 맞추어 쓸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앙부일구나 자격루 같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기구들이 만들어지는 등 높은 과학적 성취가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도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등 과학 발전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지하1층 안내

    휴게공간, 9 궁중서화, 10 왕실의례, 11 과학문화, 12 열린 수장고, 13 고궁배움터 이미지

    B1F

    궁중서화

    자세히
    보기

    왕실의례

    자세히
    보기

    과학문화

    자세히
    보기

    고궁배움터

    열린수장고

    『경자대통력』 공개 전시

    • 과학문화 상설전시실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4. 28.)을 맞아 이순신 장군의 전사 장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경자대통력(庚子大統曆)』을 공개 전시합니다.

      『경자대통력』은 1600년의 역서(曆書)로 지난해 9월 국내로 환수되어 11월에 언론에 공개된 유물입니다. 역서는 오늘날의 달력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가 달력에 일정이나, 그날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적어놓듯이 역서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써넣은 메모가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자대통력』은 임진왜란기 군사 전략가로서 활약한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년)이 직접 사용하였던 것으로, 월‧일‧절기 등을 표기한 인쇄본 위에 손수 적은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표지에 적힌 이순신 장군의 전사 기록을 비롯해 류성룡의 일상과 그의 생애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흔적들을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 류성룡이 사용했던 경자년 대통력

    • 류성룡이 사용했던 대통력
      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
      <庚子>
      조선 朝鮮, 1600년

      류성룡柳成龍(1542~1607년)이 사용했던 대통력이다. 대통력은 1370년 (공민왕 19)부터 1654년(효종 4) 시헌력이 도입되기 전까지 사용하던 역서다. 월, 일, 절기 등을 표기한 인쇄본 위에 손수 적은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날씨나 그 날 한 일, 만난 사람 등을 기록해 류성룡의 일상을 따라가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조 비 의인왕후懿仁王后(1555~1600년) 의 사망,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갔던 강항姜沆(1567~1618년)의 귀국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임시로 묶어둔 표지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1545~1598년) 장군의 전사와 관련된 상황을 묘사한 글이 적혀 있다.



    • 대통력 표지에 기록된 이순신의 전사 장면

    • 대통력 표지에 기록된 이순신의 죽음. 이순신은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노량해전은 조선. 명나라 연합군이 일본을 크게 무찔러 승리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이었다. 본 역서 표지에 적은 글에 이순신이 부하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쟁에 임하였다가 전사한 당시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해석) ...가업이 매우 넉넉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진실로 장수의 가문에 장수의 아내가 있도다.) 라고 하여 이 때문에 한바탕 웃었다. (해석)...극기가 또 말하기를 당초 여해가고금도 있을 때 내가 논핵을 받아 파직된 것을 듣고 *정호인(1587-165)의 자. 류성룡의 매제 (1587-165) **충무공 이순신의 자 (해석)(목 놓아) 크게 탄식하기를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매번 배안에 있을 때는 맑은 물을 떠놓고 다짐하였다)... (해석)전쟁하는 날에 직접 시석 무릅쓰자 부장들이 간언하여 만류하기를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하였다. (해석)(그러나 여해는 듣지 않고) 직접 출전하여 전쟁을 독려하다가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고 하였다. 아아! (슬프다) *(): 추정한 글자 :훼손되어 식별이 어려운 글자 ᄆ...: 마멸된부분 *대동력 원문과 해석은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www.gogung.go.kr/ 해독:노승석(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 대통력에 남긴 류성룡의 기록 엿보기

    • 대통력에 남긴 류성룡의 기록 엿보기. 1600년6월 ① 5일 병자, 晴 清風飄然 見府使告目 姜沆自日本來云 갬. 맑은 바람이 나부끼었다. 부사의 고목을 보니 강항이 일본에서 왔다고 하였다. *강항(1567~1618년)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붙잡혀갔다가 3년만에 돌아왔다. 귀환 후 일본의 정세와 지리 정보, 포로의 참상 등을 담은 간양록을 저술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이들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으며, 그 규모는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② 7일 무인, 柰報來 朴遇春書 李口河 許浚介藥品唐扇口口 내의 소식이 왔다 박우춘의 편지, 이口하, 허준이 약품과 당선(중국부채)을 소개하였다... *□는 판독이 어려운 글자임 *류성룡이 허준을 통해 약을 전달받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허준(1539~1615) 조선 중기의 어의로 활동하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의 피난길에 동행하기도 했다.
    • * 대통력 필사기록 해독: 노승석(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 아래 버튼을 누르면 류성룡이 『경자 대통력』에 남긴 다양한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 전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전자책 보기

    과학문화 - 대표유물

    • 측우대 測雨臺 이미지

      조선, 1782년측우대 測雨臺

      비가 내린 양을 재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1441년(세종 42) 측우기와 측우대를 처음 만들고 전국에 설치하여 강수량 측정을 제도화했다. 측우 제도는 임진왜란 등 전란을 겪으며 중단되었다가 1770년(영조 46)에 재정비되었다. 이 측우대는 1782년(정조 6) 제작하여 창덕궁 이문원摛文院(규장각 부속건물)앞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측우대 4면에는 측우기를 세우게 된 연원과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 규정각 현판 揆政閣 懸板 이미지

      조선, 1732년규정각 현판 揆政閣 懸板

      경희궁 흥정당興政堂 동쪽에 있던 규정각의 현판이다. 규정각은 1732년 영조의 명에 따라 혼천의를 보관 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규정각을 지은 경위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천문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영조가 지은 글을 새긴 <규정각기揆政閣記> 현판도 함께 전해진다.

    • 일성정시의 日星定時儀 이미지

      조선 전기일성정시의 日星定時儀

      1437년(세종 19) 세종의 명으로 제작한 시계이다. 낮에는 해의 움직임을,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관측해 시간을 측정했던 기구다. 그동안 일성정시의 형태와 구조는 문헌 자료를 통해 유추해 왔으나, 2021년 인사동에서 유물 일부가 출토되어 그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출토된 부분은 시간을 보정하는 역할을 하는 장치인 주천도분환, 별시계에 해당하는 성구백각환, 해시계에 해당하는 일구백각환 일부이다.

    • 앙부일구 仰釜日晷 이미지

      조선, 1654~1713년앙부일구 仰釜日晷

      해 위치에 따라 변하는 그림자 위치를 읽어 시각과 절기까지 알 수 있도록 만든 시계다. 앙부일구는 세종대에 처음 만들어져서조선 후기까지 다양한 재료와 형태로 제작되며 널리 활용 되었다.

    • 창경궁 자격루 昌慶宮 自擊漏 이미지

      조선, 1536년창경궁 자격루 昌慶宮 自擊漏

      1536년(중종 31) 제작된 물시계 자격루의 일부이다. 물을 흘려보내는 청동 항아리인 파수호 3점과 물을 받는 원통형 그릇인 수수호 2점이 남아 있다. 자격루는 용기에 일정한 속도로 흘러드는 물의 양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로, 세종대에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더해 처음 만들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이미지

      조선, 1395년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하늘의 모습을 구역을 나누어 배열해 놓은 천문도로 돌에 새겨 만들었다. 조선 건국 이전부터 전해져 오던 석각 천문도의 탁본을 바탕으로, 달라진 별자리 위치 등을 보정해 만들었다는 제작 경위가 새겨져 있다. 태조는 천문도를 제작함으로써 천문을 살피고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여 이를 백성에게 알리는 관상수시觀象授時의무를 실현하고, 조선 건국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알리고자 했다. 천문도 가장 안쪽 원 안에는 북두칠성처럼 1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를, 바깥쪽에는 계절별로 바뀌는 별자리를 그렸다. 별 크기와 깊이를 다르게 표현하여 밝기 차이를 나타냈다. 세월이 지나 태조 대 각석이 닳자 1687년(숙종 13)에 새로 새긴 것도 전한다.

    과학문화 - 전시해설

    과학문화 - 전시공간

    • 과학문화 -  전시공간 이미지1
    • 과학문화 -  전시공간 이미지2
    • 과학문화 -  전시공간 이미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