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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석제 '흉중성죽' 인장
石製 胸中成竹 印章
-
유물번호
창덕18568 -
연대
-
재질
석인 -
크기(cm)
가로: 2.1, 세로: 2.3, 높이: 1.9
첨부파일 :
국립고궁박물관이 창작한 석제 '흉중성죽' 인장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서체: 한인전(漢印篆)
사용자: 강세황
인장은 사용자의 신분이나 신용을 나타낸다. 조선왕조의 인장은 국새나 관인 등 국가업무용 인장, 왕과 왕비의 존업성을 상징하던 어보(御寶)를 비롯하여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던 사인(私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인은 인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조선 후기 영 · 정조 연간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이자 비평가이다.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 · 산향재(山響齋) · 표암(豹菴) 등이다. 60세가 넘어서야 영조의 부름으로 관직에 나아가 병조참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시(時) · 서(書) · 화(畵) 삼절(三絶)이었고, 뛰어난 식견으로 다른 사람의 서화작품을 감평하는 등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글씨는 동국진채(東國眞體)의 한계를 지적하고 가까운 시대의 글씨를 배울 것을 제시하여 다음 시기 추사 김정희 서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청조 고증학이 서서히 조선 학계에 전해지면서 표암의 관심은 금석과 전각에도 이르렀으며, 서화에 사용한 도장들도 손수 새겼다고 한다. 그의 도장 새기는 법은 한나라 · 위나라의 옛 법을 따랐다.
"흉중성죽"은 '마음 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대나무를 그리기 이전에 이미 작가의 마음 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동양 문인화가들의 이상을 표현한 글귀이다. 대나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을 넘어서 학문과 정신적 수양을 통해 대나무의 속성이나 상징까지도 그리고자 했던 '사의(寫意)'정신이 담겨있다.
사용자: 강세황
인장은 사용자의 신분이나 신용을 나타낸다. 조선왕조의 인장은 국새나 관인 등 국가업무용 인장, 왕과 왕비의 존업성을 상징하던 어보(御寶)를 비롯하여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던 사인(私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인은 인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조선 후기 영 · 정조 연간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이자 비평가이다.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 · 산향재(山響齋) · 표암(豹菴) 등이다. 60세가 넘어서야 영조의 부름으로 관직에 나아가 병조참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시(時) · 서(書) · 화(畵) 삼절(三絶)이었고, 뛰어난 식견으로 다른 사람의 서화작품을 감평하는 등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글씨는 동국진채(東國眞體)의 한계를 지적하고 가까운 시대의 글씨를 배울 것을 제시하여 다음 시기 추사 김정희 서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청조 고증학이 서서히 조선 학계에 전해지면서 표암의 관심은 금석과 전각에도 이르렀으며, 서화에 사용한 도장들도 손수 새겼다고 한다. 그의 도장 새기는 법은 한나라 · 위나라의 옛 법을 따랐다.
"흉중성죽"은 '마음 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대나무를 그리기 이전에 이미 작가의 마음 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동양 문인화가들의 이상을 표현한 글귀이다. 대나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을 넘어서 학문과 정신적 수양을 통해 대나무의 속성이나 상징까지도 그리고자 했던 '사의(寫意)'정신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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