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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석제 '계사인' 인장

石製 癸巳人 印章

  • 유물번호

    창덕7842
  • 연대

  • 재질

    석인
  • 크기(cm)

    가로: 2.2, 세로: 2.0, 높이: 3.6

첨부파일 :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

국립고궁박물관이 창작한 석제 '계사인' 인장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서체: 소전(小篆)
사용자: 강세황

인장은 사용자의 신분이나 신용을 나타낸다. 조선왕조의 인장은 국새나 관인 등 국가업무용 인장, 왕과 왕비의 존업성을 상징하던 어보(御寶)를 비롯하여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던 사인(私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인은 인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조선 후기 영 · 정조 연간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이자 비평가이다.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 · 산향재(山響齋) · 표암(豹菴) 등이다. 60세가 넘어서야 영조의 부름으로 관직에 나아가 병조참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시(時) · 서(書) · 화(畵) 삼절(三絶)이었고, 뛰어난 식견으로 다른 사람의 서화작품을 감평하는 등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글씨는 동국진채(東國眞體)의 한계를 지적하고 가까운 시대의 글씨를 배울 것을 제시하여 다음 시기 추사 김정희 서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청조 고증학이 서서히 조선 학계에 전해지면서 표암의 관심은 금석과 전각에도 이르렀으며, 서화에 사용한 도장들도 손수 새겼다고 한다. 그의 도장 새기는 법은 한나라 · 위나라의 옛 법을 따랐다.

"계사인"은 '계사년(癸巳年)에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강세황은 숙종 39년 계사년(1713)에 출생하여 이를 따라 계사인(癸巳人)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역대 서화가의 인장을 모은 《고금인장급화각인보(古今印章及華刻印譜)》권 3에 강세황의 또 다른 인장인 ‘광지(光之)와 나란히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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