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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대군친필전문

大君親筆傳文

※ 해제

 

󰡔대군친필전문(大君親筆傳文)󰡕은 조선의 제4대 국왕인 세종이 자신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에게 쓴 글과 효령대군이 이에 답한 글이 엮여진 책으로, 불분권 1책의 목판본이다. 제목은 표제와 판심제를 따랐다.

 

세종은 국왕의 지위를 가졌음에도 평소 형인 효령대군을 깍듯이 모셨는데, 일례로 중국 사신에게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효령대군이 세종에게 술을 돌리자 일어서서 받은 일이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묻는 사신에게 당시 관반(館伴)이었던 황희는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로서 진실로 이와 같이 할 것은 없으나, 전하께서 일어서신 것은 천륜을 중히 여긴 것이라.”라고 대답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세종실록󰡕 1423(세종 5) 47일 기사에 보인다.

 

본 책은 어사희우정(御賜喜雨亭)효령대군친필전문(孝寧大君親筆傳文)이 수록되어 있다. 어사희우정은 1425년(세종 7) 4월에 세종이 효령대군이 있던 정자를 방문했을 때 하사한 글로, 본래의 이름은 합강정(合江亭)이었다. 세종이 이 글을 지어준 배경에 대해서는 당시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변계량이 지은 희우정기(喜雨亭記)를 통해 그 대개를 볼 수 있다.

 

변계량의 문집인 󰡔춘정선생문집(春亭先生文集)󰡕 5에 수록되어 있는 희우정기에는, “주상전하가 일찍이 거둥하여 농형(農形)을 살피고 이 정자에 행차하여 신()에게 주식(酒食)과 안장차린 말을 하사하시었다. 그때가 한창 파종할 시기였으나 비가 흡족하지 않았다. 술자리가 한창일 무렵에 비가 시작해서 종일 세차게 오므로 희우(喜雨)라는 정자 이름을 내리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효령대군은 감격함을 이기지 못해 부제학(副提學) 신색(申穡)에게 희우정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쓰게 하여 처마에 걸고, 변계량에게는 글을 지어서 이 사실을 기록하라고 하였다.

 

이 글에는 세종이 두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주나라의 인자인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에 비유하며 그들의 덕을 숭상한 내용, 동쪽의 용단현(龍壇峴)에서 서쪽의 건천(乾川), 북쪽의 구룡현(九龍峴)에서 남쪽의 강나루까지를 경계로 한다는 내용, 친히 효령대군의 양한지소(養閒之所)에 희우정 편액을 지어 주었다는 내용, 이 지역의 어세(漁稅)를 통해 희우정을 유지하고 주변 백성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효령대군친필전문은 이 글을 받은지 약 60년 이후인 1484(성종 15) 2월에 효령대군이 쓴 것으로, 당시 세종이 정자에 방문하여 합강정이었던 명칭을 희우정이라 바꾸게 된 상황, 세금을 통해 희우정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준데 대한 고마움, 세종의 덕성에 대한 찬양, 여러 자손 가운데 증손인 심원(深源)에게 희우정과 관련한 수익 등을 계승한다는 내용, 이 글을 영원토록 후세에 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기호 : 4259-101)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대군친필전문과 헌종대 이후 성급된 완문인 어사완문(御賜完文)을 합쳐 중간한 판본으로 총 22책이다. 1책의 내용은 동일하나 판심제 유무, 이름이 기록된 부분이 지워진 흔적 등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본 유물은 본문의 내용 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어 간행 연대 등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세종과 효령대군의 글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어 당대 국왕의 덕정과 형을 향한 애정 등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그 가치가 높다.

 

※목차

 

- 御賜喜雨亭

- 孝寧大君親筆傳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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