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성학십도
聖學十圖
※해제
『성학십도(聖學十圖)』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9)이 유학의 대강을 풀이하여 밝히고 심법(心法)의 요점을 명시하기 위해 성학(聖學)의 개요를 그림으로 설명하여 선조에게 올린 것이다.
본 유물에는 표지 뒷면에 내사기가 있는데, “건륭 9년(1744) 3월 24일에 동부승지 권일형(權一衡, 1700-?)에게 『성학십도』 1건을 내사하니, 사은하지 말라. [乾隆九年三月二十四日, 內賜同副承旨權一衡, 聖學十圖一件, 命除謝恩. 右承旨 洪 (手決)]”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의 우승지는 홍상한(洪象漢)이었다.
본 책은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올리는 차자(箚子)로 시작한다. 내지 첫 면 우측 상단에는 8.0X8.0cm의 주문방인(朱文方印) ‘선사지기(宣賜之記)’가 1과(顆) 날인되어 있으며, 우측 하단에는 소장자인으로 추정되는 ‘辛永吉’, ‘智雲’, ‘在圓居士’ 등 2.4X2.4cm의 주문 및 백문방인의 인장들이 날인되어 있다.
이후 열 개의 도설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다. 첫 번째는 「태극도(太極圖)」로,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근거하여 주희의 해설, 선유(先儒)의 주해 등을 인용하며 자신의 설을 부기하였다. 두 번째는 「서명도(西銘圖)」로, 이는 장재(張載, 1020~1077)의 『서명(西銘)』에 근거하여 주희의 해설 및 양귀산(楊龜山)과 쌍봉요씨(雙峯饒氏)의 주해를 인용하고 자신의 설을 부기하였다. 세 번째는 주희의 『소학(小學)』을 체계화한 「소학도(小學圖)」로, 뒤에 소학제사(小學題辭)와 혹문(或問), 소학도를 그린 이유 등을 서술하였다.
네 번째는 대학(大學)을 체계화한 「대학도(大學圖)」, 다섯 번째는 주희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규약에 근거한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여섯 번째는 정복심(程復心, 1257~1341)의 것을 수정한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일곱 번째는 공자의 인(仁) 개념을 설명한 「인설도(仁說圖)」, 여덟 번째는 정복심의 설을 수정한 「심학도(心學圖)」, 아홉 번째는 주희의 경재잠(敬齋箴)에 근거한 「경재잠도(敬齋箴圖)」, 열 번째는 남당(南塘)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근거한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이다.
이 가운데 퇴계는 정복심의 「심통성정도」와 「심학도」 등에 대해 이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는데, 임은의 사상적 체계와 그 성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못했다. 이는 2012년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 교수가 일본에서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한 정복심의 「사서장도(四書章圖)」 초간본의 내용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의 끝에는 발문(跋文)이 실려 있는데 이는 1681년(숙종 7) 10월에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이 지은 것으로, 경연에서 『성학십도』를 읽은 소회 및 각 도설에 대한 요지를 서술하였다.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심오한 의리를 10개의 도식으로 그려 풀이한 것으로, 성리학의 대개를 일목 요연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정에서도 계속해서 중시되어 왔다.
이는 『선조실록』1569년(선조 2) 9월 4일의 기사인 “상이 『성학십도』 40여 건을 반사(頒賜)하고 또 중면자(中綿子)를 1인당 2근씩 하사하였다.”는 내용이나, 『고종실록』1877년(고종 14) 11월 11일의 기사인 “일본 외무대승 하나부사 요시모토 이하에게 선물의 종류를 갖추게 하다.”에서 이 책을 선물로 한 내용 등을 통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기호 :한은 24)을 비롯하여 여러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관 소장본은 내사기가 기록되어 있고 내사인이 날인되어 있는 내사본으로 더욱 가치가 있다.
※목차
- 進聖學十圖箚(幷圖)
- 第一太極圖, 第二西銘圖, 第三小學圖, 第四大學圖, 第五白鹿洞規圖, 第六心統性情圖, 第七仁說圖, 第八心學圖 存心, 第九敬齋箴圖, 第十夙興夜寐箴圖
- 跋文(吳道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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