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태학갱재축
太學賡載軸
※해제
『태학갱재축(太學賡載軸)』은 고종이 1872년(고종 9) 2월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며 지은 오언절구와, 이에 대해 성균관 대사성[泮長]과 거재 유생들이 화운(和韻)한 시를 모은 첩이다.
권말의 ‘壬申九月日 丕闡堂刊印’이라는 간기를 통해, 행사가 있은 후 약 7개월 후인 1872년[壬申] 9월에 비천당(丕闡堂)에서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천당은 성균관의 별당으로, 재생들의 학습 장소 또는 임금이 직접 친림하여 시험을 치루던 과거 시험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 당시의 상황은 “오늘 석전제를 친히 행할 것인데, 반장(泮長)과 거재 유생을 불러서 부자(夫子)의 학문을 강론하고 부자의 도를 밝히니 나의 마음이 흐뭇하다. 아! 너희 제생들은 나의 뜻을 잘 받들어 각자 뜻을 굳게 가지고 행실을 수양하며 유학을 숭상하여 이 대도(大道)를 빛내라. 이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라고 하며, 어제시를 짓고는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했다는 『고종실록』 1872년 2월 2일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본 책은 고종이 명륜당에 나아가 대사성과 유생들을 입시하게 하여 『논어』를 경연한 내용을 기록한 연설을 시작으로 하여 고종이 지은 어제시를 기록해 주었다. 고종은 “선왕들의 옛 법을 계승하여, 반궁(泮宮)을 찾아 문묘에 제사 지냈네. 부자(夫子)의 학문을 강론하니, 우리의 도가 더욱 빛나도다[仰述先王禮, 泮宮釋奠成, 講論夫子學, 吾道益光明].”라는 내용의 오언절구를 지어 보였다.
어제시 뒤에는 세주로 갱진에 참여한 신하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고, 이어서 김병학(金炳學, 1821~1879), 홍순목(洪淳穆, 1816~1884), 이최응(李最應, 1815~1882) 등 총 297명의 신하들이 ‘성(成)’자와 ‘명(明)’자에 압운하여 지은 오언절구가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다. 유사(有司)로는 생원 이교식(李敎植) 등 4인, 감인(監印)으로는 유학 민영준(閔泳駿) 등 4인이 참여하였다.
임금이 지은 시에 신하들이 운자를 맞추어 화답하는 갱진(賡進)은, 중국 고대 경서인 『서경(書經)』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군신간의 장구한 문화 중 하나였다. 임금이 특정 장소에 거둥하여 그 감회를 읊거나, 특별한 경사가 있을 경우, 건축물을 영건 및 중건하였을 때를 기념하여 주로 이루어졌다. 이는 각종 사료 및 갱진에 참여한 문신들의 문집 등을 통해 그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본 유물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소장기호 : K4-333)과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기념도서관(소장기호 : 고서(I) 811.91)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고종의 어제와 당대 최고 문신들의 화답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또한 본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철종)어제갱진시』(고궁1899), 『영조어제화진첩』(고궁1837), 『기과갱재록』(궁중433) 등과 연관하여 참고할 수 있다.
※목차
- 筵說
- 御製
- 賡進詩
- 刊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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