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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기상패인갱재록

耆相佩印賡載錄

󰡔기상패인갱재록(相佩印賡載錄)󰡕은 영조가 1772(영조 48)에 기로사 당상(堂上)을 소견한 후 영조가 하사한 시와 왕세손 및 기로소의 신하들이 화답하여 올린 갱진시를 모아 엮은 것이다. 활자본 1책이다.

 

기로소는, 조선 시대에 관직에서 물러난 나이 든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70의 나이를, ()80의 나이를 뜻하여 이처럼 이름하였으며 정식 명칭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이다. 처음에는 친목 기구의 성격을 띠었으나, 1765(영조 41)부터 독립 관서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현직 관리가 그 대상이었으며, 국왕 또한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에 숙종은 59세에,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조선 전 기간동안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700여 인으로 전해진다.

 

이 때 영조가 기사 당상들을 소견한 상황은 󰡔영조실록󰡕 177213일 기사 및 같은 날 󰡔승정원일기󰡕 기사에 자세하다. 영조는 집경당에 나아가 한익모(韓翼謩) 등을 소견하고, 어제시 1구를 써 내렸고 제신들로 하여금 갱진하게 한 뒤 음식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서명선(徐命善)에게 명하여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지은 󰡔기상패인갱재록󰡕의 발문을 읽도록 하였다.

 

이 책은 영조의 어제시 1구와 왕세손의 화답시, 제신들의 시, 한익모의 전문(箋文), 서명응의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제시는 甲歲閣前受几杖, 辛年前席賜金印72구로, 본관 소장본에는 어제시 부분이 결락되어 있다. 이에 왕세손은 甲歲盛儀臨壽杖, 耆英恩推錫金印이라는 화답시를 지었다. 그리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상복(金相福),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김치인(金致仁)을 비롯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 오재소(吳載紹)에 이르기까지 총 64명 신하들의 화답시가 실려 있다. 이 시들은 영조 어제의 운자인 장()자와 인()자에 화운하였으며, 왕께서 인()을 하사한 은혜를 송축하고,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뒤이어 세손부(世孫傅) 한익모(韓翼謩, 1703-?)가 신하들을 대표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은 전문(箋文)과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서명선이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발문에는 국조의 기사는 반드시 정 2품 이상의 70을 넘긴 자여야 비로소 들어올 수 있다. 그러므로 기사가 설치된 지 300여년이 넘었음에도 항상 10인도 채우지 못하였는데, 당조(當朝)22명이나 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하는 등 당시 국왕이 이를 기념하고 인을 하사한 이유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본 자료는 국립중앙도서관(소장기호 : 古朝45-453)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전래되고 있는 판본이 많지 않은 희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국가 원로를 예우하는 당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으며 어제어필과 왕세손 및 당대 최고 문신들의 화답시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또한 본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조어제화진첩󰡕(고궁1837), 󰡔기과갱재록󰡕(궁중433) 등과 연관하여 참고할 수 있다.

 

※목차

 

- 王世孫賡進

- 諸臣賡進

- 相臣謝箋

- 徐命膺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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