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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서거정신도비명

徐居正神道碑銘

※ 해제


서거정신도비명(徐居正神道碑銘)1786(정조 10)에 개수한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신도비명을 탁본한 것이다서거정의 신도비는 현재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산 44-1에 위치하고 있다.


서거정의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자는 자원(子元) 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정정정(亭亭亭)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1444(세종 26)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후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으며, 부교리(副校理),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 예조참판,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연이어 역임하였다.


그는 문장에 일가를 이루었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1476(성종 7)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하였으며,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편찬하였다. 1480(성종 11)에는 『오자(吳子)』를 주석하였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으며, 1485(성종 16)에는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하였다. 이를 통해 사관의 결략을 보충하고 자신의 역사 의식을 투영하였다. 이듬해에는 한문 수필집인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하는 등 세조대에서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약 23년여간 조선 전기 문병을 장악했던 문장가이다.


본 비문은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홍문관대제학(兼弘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성균관사(知經筵成均館事)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揔府都揔管) 세자이사(世子貳師) 달성군(達城君) 증시문충서공신도비명(贈諡文忠徐公神道碑銘) 병서(幷序)라는 비제로 시작하고 있다. 뒤이어 이 비문의 찬자인 어세겸(魚世謙), 신도비 개수시 산삭에 참여한 서명응(徐命膺, 1716~1787년), 전서를 쓴 서유린(徐有隣, 1738~1802년), 글씨를 쓴 서정수(徐鼎修, ?~1804년) 등 방손(傍孫) 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일반적인 비문에서는 찬자 및 서사자 등의 이름은 주로 말미에 새기는 데, 이 비문의 경우 신도비를 개수하며 기존의 비문을 산삭하고 새로운 부분을 추기하였기 때문에 이를 서두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은 서거정의 신도비를 개수하게 된 경위와 각자 분담한 일 등을 기록한 후, 기존에 어세겸이 지었던 비문을 편집하여 수록하였다. 어세겸이 비문을 지어준 후 300여 년이 지나 박락되고 결절되어 남아 있는 부분의 점획이 분명치 않은 점 등으로 인하여 개수를 결정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지는 비문에는 그의 가계와 과환 이력, 사망, 시호 추증, 배우자, 문장에 관한 세간의 평가,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의 삼불후(三不朽)를 겸비했다는 명성의 정당성, ()이 이어지고 있다.


비문의 마지막에는 皇明弘治己酉後二百九十八年丙午冬改竪라고 적혀 있어, 1489 처음 신도비를 세웠으며 그 후 298년이 지난 1786 겨울에 이를 개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본 유물은 조선 전기의 대표 문인인 서거정의 과환(科宦) 이력과 주변 지인들의 평가를 기록한 원 비문을 산삭하여 수록하였으며, 신도비의 개수 경위와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비문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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