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제월당경헌대사비명
霽月堂敬軒大師碑銘
※ 해제
〈제월당경헌대사비명(霽月堂敬軒大師碑銘)〉은 제월당(霽月堂) 경헌대사(敬軒大師, 1544~1633년)의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제월당경헌대사비〉는 1991년 4월 1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3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연천군 신서면(新西面) 내산리(內山里) 342-1번지에 위치해 있다.
제월당 경헌대사는 청허당(淸虛堂) 휴정대사(休靜大師)의 제자로 알려진 선승(禪僧)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속성은 조씨(曺氏), 법호는 순명(順命)이다. 제월당은 당호이며, 경헌은 법명이다. 그는 15세에 출가하여 91세에 입적할 때까지 수행에 몰두하였으며,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판선교양종사(判禪敎兩宗事)로 임명되었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수행과 교화에만 몰두했다.
그가 1633년(인조 11)에 입적한 후, 3년 뒤인 1636년(인조 14)에 제자 설현(雪玄)은 그의 공덕을 기려 보개산(寶蓋山) 심원사(深源寺)에 제월당대사비를 건립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 도일(道一) 등은 당시 문장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신익성(申翊聖, 1588~1644년)에게 비문을 지어 줄 것을 여러 차례 부탁하였으며, 스승의 절의를 숭상하고 위상을 보존하고자 그의 문장을 모아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에 『제월당대사집(霽月堂大師集)』을 간행하였다.
비문은 유교를 중심으로 하며 불교를 배척하던 당대 분위기에서 청허당 휴정대사만이 선종의 정통을 계승한 승려였는데, 그의 여러 제자 가운데 경헌대사가 수행이 깊고 덕이 충만하여 계율(戒律)과 선해(禪解)로 일가를 이루었음을 말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뒤 찬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경위, 경헌대사의 출생과 어릴 적 모습, 출가 과정, 임진왜란 때의 공적, 선조의 직첩을 사양하고 자취를 감춘 은거 생활, 치악산 보개산에서 머물다 돌연 입적하게 된 상황, 고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찬자의 생각, 명(銘)의 순서로 마무리되고 있다.
명(銘)이란, 묘비문 등의 후반부에 고인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4자의 운문으로 지은 것을 말한다. 이 비문에서는 “속세와는 이별했으나 천리에는 합치했도다. 변함없는 수행으로 만고에 빛나리라[而睽於人, 而合於天, 而恒而行, 萬古常鮮]라는 비교적 짧은 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찬자인 신익성의 문집인 『낙전당집(樂全堂集)』 권12 비명(碑銘)에 「제월당경헌대사비명 병서(霽月堂敬軒大師碑銘 幷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비문은 ‘光德大夫東陽尉申翊聖撰’이라는 찬자 부분까지만 탁본되어 있는데, 뒤에는 ‘義昌君珖書幷篆, 皇崇禎九年八月日立雪玄’라는 두 줄의 기록이 더 있다. 선조의 4남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1589~1645년)이 글씨와 전서를 썼으며, 경헌대사의 제자인 설현이 1636년 8월에 비석을 건립한 내용은 탁본에 빠져 있다.
본 유물은 제월당 경헌대사의 생애와 출가 과정, 그의 업적, 당시 문인들의 선사(先師) 추숭 활동 등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17세기 조선시대 선승의 계통 연구에 보탬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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