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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활짝 핀 꽃나무 속 우뚝 솟은 세심대(洗心臺): 세심궁도형(洗心宮圖形)

활짝 핀 꽃나무 속 우뚝 솟은 세심대(洗心臺): 세심궁도형(洗心宮圖形)

 조선시대 궁궐이나 사묘를 영건(營建)할 때, 터를 정하고 선정된 장소의 형세를 살피기 위하여 그림을 그려 왕에게 검토를 받았습니다. 국왕이 일일이 친림(親臨)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사를 담당하는 영건도감 등의 관원들이 대상지역을 미리 답사하고, 때로는 화원을 대동하여 배치도, 즉 도면을 그린 것입니다. 

洗心

<세심궁도형(洗心宮圖形)>은 유물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심궁을 그린 것으로 간가도(間架圖) 형식의 도면입니다. 건물 기둥과 기둥 사이의 한 칸[間]을 기준으로 삼아 작성하는 간가도는 간결한 형태의 평면도이지만 건물의 규모와 배치 현황을 한눈에 보여줍니다(도1).


洗心


한가로운 날 꽃다운 봄철에 세심대 올라, 세속의 소란함을 씻네. 
두 산은 참으로 문이 하나이고, 많은 나무는 또한 같은 정원에 있네. 
곱고 고운 하늘빛이 단정하고, 오르고 오르니 땅의 기세가 높네.
앉아 있는 자리에 백발 노인이 많으니, 내년에도 또 오늘처럼 술 한 잔 하세나.

暇日芳春節 心臺洗俗喧
兩山眞一戶 千樹亦同園
艶艶天光? 登登地勢尊
坐間多皓髮 來歲又今樽




1791년(정조 15) 3월 17일 정조는 증조 할머니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하고, 선희궁(宣禧宮,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사당) 등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신하들과 함께 선희궁 뒤에 있는 세심대(洗心臺)에 올랐습니다. 위의 시는 세심대에 올라 꽃구경을 하면서 즉석에서 직접 지은 정조의 어제시(御製詩)로, 이것을 새긴 현판 또한 우리 박물관에 전하고 있습니다(도2).


도2. 등세심대상화구점(登洗心臺賞花口占), 1791년(정조 15), 나무, 가로 79.7, 세로 48.7cm, 창덕20844

시에 묘사된 백발의 노인들은 당시 세심대에 함께 올랐던 신하들인데, 정조는 이들에게 차가 끓기 전에 화답시를 즉시 지어 올리고, 지어 올린 순서대로 정조가 쓴 어제시축(御製詩軸)의 뒤이어서 쓰도록 했습니다. 또한 내각(內閣)에 명하여 화답시를 지은 신하들에게 한 통씩 써서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한 정조의 어제시와 신하들의 화답시를 담은 <세심대갱재축(洗心臺?載軸)> 중 한 점 역시 우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있습니다(도3).

도3. 세심대갱재축(洗心臺?載軸) 부분, 종이에 먹, 가로 759.5, 세로 33.5cm, 고궁2197

정조는 이후에도 할머니의 위패를 모신 선희궁을 배알할 때 세심대에 오르곤 했는데, 이는 경치를 감상하는 것만이 아닌 아버지를 여윈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심대와 사도세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본래 세심대(세심정)는 이향성(李享成, 1524~1592년)이 거처하던 곳으로 봄이면 살구꽃이 만발하고 맑은 샘이 콸콸흐르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셋째 아들 이정민(李貞敏, 1556~1638년)의 묘갈명에 의하면 광해군이 이곳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762년 5월 13일 『승정원일기』에 세심궁은 어느 때인가 세워졌는데 궁인이 몸조리하기 위한 곳이며, 지금은 이름만 남은 곳으로 내수사에 속하게 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광해군 때부터 용인이씨(龍仁李氏) 집안의 소유가 아닌 왕실 소유로 편입되어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62년 6월 15일 영조는 육상궁을 전배하고 세심궁에 나아가, 경치를 감상하며 이전에 세심궁에 사도세자의 사우(祠宇)를 짓도록 하교했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세심궁의 자리에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사도묘(思悼廟)를 건립하게 되는데, 1764년(영조 40) 2월 1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3개월만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철거하고 동부 숭교방에 수은묘라는 이름으로 옮겨 지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같은 자리에 경모궁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세심궁도형>은 1762년(영조 38) 세심궁에 사도세자의 사우를 짓도록 하교하고, 1764년(영조 40) 사도묘를 건립할 때 세심궁의 형세를 파악하기 위해 그린 도면으로 추정됩니다. 뒷면에 붙어 있는 관리표식과 관리하면서 쓴 것으로 보이는 연필로 쓴 흔적 등으로 예전에 <선희궁도형>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제향을 위한 공간인 재실, 이안청, 전사청 등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산정(山亭)과 원(園) 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컨대 사대부의 주택 또는 별서(別墅)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면에 ‘세심궁외담’이라는 묵서가 선명하여 선희궁이 아닌 세심궁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단부에 ‘기와집 100칸, 빈터[空垈] 800칸’ 등의 규모가 적혀 있고, 담장 밖 주변에 ‘안생원가(安生員家)’를 비롯한 인가(人家)를 기록하고 있어, 사도묘의 터로 선정된 세심궁의 입지와 형세를 조사하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참고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조선왕실 건축도면』, 2013년
김지희, 전봉희, 「세심대 일원의 변천과 사도묘(思悼廟)의 건립과정 -「경모궁구교도」의 분석을 통하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33, 2017년



안보라(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