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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 교룡기(交龍旗)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 교룡기(交龍旗)

<화성원행도(華城園幸圖)>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 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한 뒤 다시 궁궐로 돌아오는 모습을 담은 병풍 그림입니다. 여덟 폭의 그림 중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로 이름 붙여진 장면에는 정조가 한양의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임시 거처인 시흥행궁(始興行宮)으로 향하는 행렬이 담겨 있습니다.[도 1] 왕의 행차를 수행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도 눈길을 끌지만, 그 중에서도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큰 깃발이 단연 돋보입니다.[도 2] 노란색 배경에 붉은 테두리를 갖춘 깃발에는 두 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룡기입니다.

교룡기는 왕이 행차할 때 갖추는 의장물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깃발이었습니다. 순서상으로도 행렬의 앞쪽에 배치되었고 크기 또한 압도적이었습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교룡기를 보면 깃발의 크기가 4m에 가깝습니다.[도 3] 상승하는 모습과 하강하는 모습의 두 마리 용이 가운데에 여의주를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는 모양이며 주변으로는 상서로운 분위기를 암시하는 구름 문양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림 속의 교룡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왕을 상징하는 용이 표현된 점이나 거대한 크기로 보아 행렬의 선두에서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깃발로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교룡기가 본래부터 왕의 행차에 쓰인 의장물은 아니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왕이 군대를 열병하면서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던 군기(軍旗)였습니다. 조선 후기인 영조대부터 교룡기가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왕만이 가질 수 있는 군 지휘권을 통해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의장물이었던 것입니다.  교룡기는 군사 지휘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재위 중인 왕의 의장에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돌아가신 왕의 장례 행렬 등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교룡기는 기록에 따라서 용대기(龍大旗)라고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도 4] 왕의 의장에 쓰인 깃발들은 크기가 다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큰 깃발이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이러한 크기 때문에 교룡기가 움직일 때는 한 마리의 말과 다섯 명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한 명이 말을 탄 채로 담통이라고 하는 받침에 꽂아서 깃발을 잡고 여기에 줄을 연결하여 말의 앞뒤로 각각 두 명씩, 총 네 명이 함께 줄을 잡아 지탱하였습니다.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 교룡기(交龍旗)


신재근(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