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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를 그려 공을 기리다 - 오자치 초상

초상화를 그려 공을 기리다 - 오자치 초상

이번에 소개해드릴 유물은 보물 <오자치 초상>입니다. 오자치(吳自治)는 세조부터 성종 때까지 활동한 조선 전기의 무관으로 그의 후손들이 500년 넘게 소장하고 있었던 초상화를 2017년에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해 주셨습니다.

오자치는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역시 세조 때인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총 45명이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이들에게 “적개공신(敵愾功臣)”이라는 공신호가 내려졌습니다. 이 초상화는 바로 적개공신으로 책록되면서 하사 받은 초상화입니다.

초상화 속 오자치는 검은색 사모에 짙푸른 색의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하얀색 신발을 신고 발받침 위에 발을 올리고 있으며 허리춤에는 ‘서대’라고 하는 무소의 뿔로 장식한 띠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가슴에는 화려한 금색의 흉배를 달고 있는데 호랑이와 표범이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무관들은 무예나 용맹을 상징하는 들짐승을 흉배에 그렸습니다. 그래서 이 흉배를 보면 주인공이 무관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문관인 경우에는 고상한 학문적 가치관을 상징하는 새 종류가 그려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오자치는 무관으로써 활을 아주 잘 쏘았다고 합니다. 성종 때 임금과 함께 활을 쏘고, 짐승 가죽을 상으로 받은 기록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오자치 초상> 외에도 적개공신으로 그려진 초상화가 현재 두 점 더 남아있습니다. 장말손(張末孫)과 손소(孫昭)라는 분의 초상화입니다. 그림을 보면 거의 같은 형식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분들은 문관이었기 때문에 흉배에 새가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이 적개공신 초상화는 공신 책록이 되고부터 10여년 뒤에 그려졌습니다. 공신 책록은 1467년이고, 9년 뒤인 1476년에 왕이 충훈부에 명을 내려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내용이 이 손소라는 분의 ?양민공유사(襄敏公遺事)?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그림이 1476년경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공신들에게 작위와 토지, 노비 등을 내려주는 한편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신들의 뜻을 기리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공신 초상화는 공신의 종가에 내려져 사당이나 영당에 봉안되었습니다. 공신 집안이라는 것을 만방에 내세울 수 있도록 해서 그 공을 치하하고 다른 백성들에게는 귀감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신 초상화는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공신 초상화는 왕의 명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당대에 가장 명망 있는 화가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오자치초상>을 그린 화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로써는 가장 실력이 뛰어한 화가가 그린, 수준 높은 작품이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공신 초상화는 그린 시기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초상화 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공신 초상화가 중요한 기준작이 됩니다. <오자치초상> 역시 1476년이라는 제작시기가 확인되고 있어서 15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과 같이 큰 전란을 겪으면서 상당히 많은 그림들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조선 전기의 그림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조선 전기에 그려진 초상화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 이시애의 난 : 세조가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서울에서 파견한 관리로 대체하고 수령들에게 지방 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였다. 이런 상황이 되자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1467)는 유향소의 불만, 이 지역 백성들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1467년 5월 반란을 일으켰다.

오자치 초상

장말손 초상,손소 초상

 


신재근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