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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궁중의 서양식 음식문화 - 식기와 제작도구

궁중의 서양식 음식문화 - 식기와 제작도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창덕궁에서 이전된 '서양식 식기와 제작도구'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식기들의 외형은 외국영화 속 연회장에서나 볼법한 화려한 서양식 집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집기들을 사용하였던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사용범위가 개항기부터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된 일제강점기까지 넓게 포함됩니다. 다만 개항한 이후부터 대한제국기를 걸쳐 서양식 도자기를 적극적으로 유입하고 사용하고자 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어 궁중에서도 이와 같은 서양식 음식문화가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 개항한 이후,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왕을 접견하는 각국 공사 등 외국인들을 위한 서양식 연회가 열리게 되면서 서양 예법과 물품을 궁중에 들이게 됩니다.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에는 궁중에서 접한 서양식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느 유럽의 왕실과 다르지 않은 연회석상에 대해 놀라워하거나 중국제 샴페인에 대하여 혹평하는 일화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지리학자인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가 조선을 여행한 기록을 담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이라는 책에는 궁궐에 초대를 받아 대접받은 서양식 음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란색 비단이 드리워진 수수한 방으로 안내되어 우리는 곧 커피와 케이크를 정중하게 대접받았다. 그 후 저녁식사는 상궁이 궁중역관의 도움을 받아 아주 아름답게 꾸며진 식탁을 앞장서서 주도해 나갔다. 저녁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차려졌다. 수프를 포함해서 생선, 퀘일, 들오리 요리, 꿩 요리, 속을 채워 만든 쇠고기 요리, 야채, 크림, 설탕에 버무린 호두, 과일, 적포도주와 커피 등등이었다. 궁중 시인(侍人)들과 그 밖의 몇 사람이 우리와 함께 식사를 했다.”



주전자, 튜린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는 만찬장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다양한 식기들이 남아있습니다. 프랑스, 영국 등 유럽 등지의 ‘튜린(tureen)’, ‘주전자’와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서 제작한 서양식 식기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집기들은 외형으로도 서양식 식기임을 알 수 있지만, 바닥면에 찍힌 제조사 마크로 제작한 시기와 제조국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소장품 중에는 독특하게 디저트를 만드는 서양식 제작도구들도 남아있습니다. ‘와플틀’은 요즘 우리가 먹는 와플과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하지 않나요?

와플틀, 빵틀

특히 고사리 같이 구불구불한 장식이 있는 제과형틀은 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이와 같은 제과형틀은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10여 점 이상이 있으며 각기 모양이 다른 형태입니다. 하단에는 원형의 십자가가 그려진 마크가 찍혀 있는데, 이는 ‘벤험 엔 프루드(Benham & Froud)’라는 영국 런던 회사의 마크입니다. 이 회사는 주방용기와 화려한 제과형틀을 제작하는 곳으로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만 이 마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작한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마크 아래에 적힌 숫자는 아마도 제작번호이겠지요. 위와 같이 화려한 제과용기는 영국에서 나온 책자에 “젤리와 케이크 몰드(jelly & cake mould)”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제과형틀의 활용방법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궁중에서 서양식 생활양식을 도입한 것은 당시 조선을 방문하였던 서양인들을 위한 문화적인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향유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시대상황에 맞게 변화하고자 하는 당시 궁중의 모습으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물들은 빈 집기들로 현재 수장고에 남아있지만, 궁중 연회장에서 최고급 요리를 담고 있었을 화려한 옛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김아란(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