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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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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첩 -가짜를 사야만 했던, 믿을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내릴 때 주는 임명장을 교지(敎旨)라고 합니다. 교지는 관원을 임명할 때뿐만 아니라 임금이 시호(諡號),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할 때도 발급되었는데, 대한제국시기에는 황제가 내려주는 칙명(勅命)이라는 문서가 이를 대신하게 됩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도 많은 교지와 칙명이 있는데, 대부분 관직 임명과 관련한 문서들입니다. 오늘 소개할 문서도 역시 관직 임명 문서인데, 찬찬히 살펴보면 어딘가 이상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이 문서의 명칭은 조선시대 임명장인 교지도, 대한제국시대 임명장인 칙명도 아닌 교명(敎命) 입니다. 그리고 임명되는 사람 이름이 쓰여 있어야 할 부분은 공난으로 비워두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경기전(慶基殿)의 행(行) 수원참봉(水原參奉)인 관직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행’자는 받는 사람의 품계보다 ‘수원참봉’이라는 직책의 품계가 낮기 때문에 붙인 것입니다. 이는 행수(行守)법으로, 관리의 품계에 대응하는 관직 수가 한계가 있어서 시행된 인사법규입니다. 행수법에 따라 당시 임명장은 품계가 높은 사람에게 낮은 직책을 수여하면 행(行)이란 글자를, 품계가 낮은 사람에게 그 보다 높은 직책을 수여하면 수(守)라는 글자를 써서 발급하였습니다. 문서를 발급한 일시는 대한제국시기인 광무 6년 3월 모일로 일자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옥새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날인되어 있습니다. 문서의 마지막에는 문서 발급자의 직함과 이름인 ‘궁내부 대신 육군부장 심상훈’이 적혀 있고, ‘궁내부대신인(宮內府大臣印)’이라는 인장이 날인되어 있습니다.
이미 대부분 눈치 채셨겠지만, 이 문서는 가짜 임명장입니다. 조선후기부터 빈곤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관직을 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이때 발급한 임명장은 이름을 비우고 발급한 문서라는 뜻으로 ‘공명첩(空名帖)’이라고 합니다. 공명첩을 산 사람들은 관직을 받고, 역(役)에서 면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돈으로 산 관직은 실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국가는 역을 면제시켜준 만큼 재정 또한 정상적으로 충당되지 않아 재차 공명첩을 발급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공명첩은 무거운 짐으로 남게 됩니다. 급기야 국가는 직접 나서서 백성들에게 공명첩을 강매하기까지 했습니다. 즉, 공명첩은 백성들에게 곤욕이었고, 관직을 원치 않아도 억지로 구매해야하는 골칫거리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공명첩은 계속해서 발급되어 조선의 구석구석을 뒤덮게 됩니다. 심지어 이 와중에 지방에는 가짜 공명첩까지 나돌았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문서는 바로 이러한 가짜 공명첩입니다. 공명첩은 돈을 받고 관직을 주기 위해 발급된 문서였으나, 그래도 국가에서 발급한 공적인 문서였기 때문에 관직 수여자의 이름을 비워둔 부분을 제외하고는 공식 임명장과 서식이 같습니다. 하지만 위의 문서는 서식이 어설프기 그지없습니다. 먼저 문서 발급 시기가 대한제국시기 이기 때문에, 문서는 ‘칙명’이라는 이름으로 발급되어야 했습니다. 이 문서에 기록된 ‘교명’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왕비, 왕세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문서로, 이 가짜 공명첩은 만든 사람이 문서 명칭조차 혼용하여 잘못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문서에 찍힌 인장들도 어딘가 엉성합니다.
이미 대부분 눈치 채셨겠지만, 이 문서는 가짜 임명장입니다. 조선후기부터 빈곤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관직을 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이때 발급한 임명장은 이름을 비우고 발급한 문서라는 뜻으로 ‘공명첩(空名帖)’이라고 합니다. 공명첩을 산 사람들은 관직을 받고, 역(役)에서 면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돈으로 산 관직은 실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국가는 역을 면제시켜준 만큼 재정 또한 정상적으로 충당되지 않아 재차 공명첩을 발급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공명첩은 무거운 짐으로 남게 됩니다. 급기야 국가는 직접 나서서 백성들에게 공명첩을 강매하기까지 했습니다. 즉, 공명첩은 백성들에게 곤욕이었고, 관직을 원치 않아도 억지로 구매해야하는 골칫거리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공명첩은 계속해서 발급되어 조선의 구석구석을 뒤덮게 됩니다. 심지어 이 와중에 지방에는 가짜 공명첩까지 나돌았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문서는 바로 이러한 가짜 공명첩입니다. 공명첩은 돈을 받고 관직을 주기 위해 발급된 문서였으나, 그래도 국가에서 발급한 공적인 문서였기 때문에 관직 수여자의 이름을 비워둔 부분을 제외하고는 공식 임명장과 서식이 같습니다. 하지만 위의 문서는 서식이 어설프기 그지없습니다. 먼저 문서 발급 시기가 대한제국시기 이기 때문에, 문서는 ‘칙명’이라는 이름으로 발급되어야 했습니다. 이 문서에 기록된 ‘교명’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왕비, 왕세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문서로, 이 가짜 공명첩은 만든 사람이 문서 명칭조차 혼용하여 잘못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문서에 찍힌 인장들도 어딘가 엉성합니다.
이 문서에는 대한제국시기에 황제가 사용하던 국새인 ‘칙명지보’가 날인되어 있는데, 이 인장의 형태는 상당히 조잡스럽습니다. 당시 국새는 금속으로 제작되었는데 문서의 인면(印面)에 보이는 세로줄 무늬는 나뭇결로, 즉 가짜로 나무 도장을 새겨서 찍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궁내부대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인장은 거의 어그러져서 형태를 확인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럼 이런 가짜 문서는 왜 생겨났던 것일까요? 관직을 갈망하던 백성들이 양반이 되고 싶어서 남몰래 만들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문서는 지방 수령이나 그 아래 아전들이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강매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선후기부터 국가에서는 강제로 공명첩을 팔아서 부족한 재정을 채웠는데, 지방의 관리들은 이러한 방식의 허점을 노렸습니다. 가짜 공명첩을 만들어서 백성들의 돈으로 국가재정 대신 자기 배를 불려 나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지방 관리들은 실제 문서와 같이 정교한 모습의 가짜 문서를 만들 능력은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조차 제대로 몰랐던 대다수 백성들은 그들이 사야하는 이 문서가 실제 문서인지, 가짜 문서인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비슷하게 흉내만 내어도 쉽게 속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은 국가에서 억지로 사도록 강요한 공명첩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야만 했고, 가짜 공명첩 또한 부패한 관리들의 등쌀에 못 이겨 사야만 했습니다. 이 문서에는 이름이 기재되지 않아서 문서가 실제 강매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실제 이름이 기재된 유사한 형태의 가짜 문서가 상당 수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을 지는 충분히 짐작됩니다.
백성들은 이 같은 억울함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했을까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이 사회 속에서.
그럼 이런 가짜 문서는 왜 생겨났던 것일까요? 관직을 갈망하던 백성들이 양반이 되고 싶어서 남몰래 만들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문서는 지방 수령이나 그 아래 아전들이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강매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선후기부터 국가에서는 강제로 공명첩을 팔아서 부족한 재정을 채웠는데, 지방의 관리들은 이러한 방식의 허점을 노렸습니다. 가짜 공명첩을 만들어서 백성들의 돈으로 국가재정 대신 자기 배를 불려 나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지방 관리들은 실제 문서와 같이 정교한 모습의 가짜 문서를 만들 능력은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조차 제대로 몰랐던 대다수 백성들은 그들이 사야하는 이 문서가 실제 문서인지, 가짜 문서인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비슷하게 흉내만 내어도 쉽게 속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은 국가에서 억지로 사도록 강요한 공명첩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야만 했고, 가짜 공명첩 또한 부패한 관리들의 등쌀에 못 이겨 사야만 했습니다. 이 문서에는 이름이 기재되지 않아서 문서가 실제 강매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실제 이름이 기재된 유사한 형태의 가짜 문서가 상당 수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을 지는 충분히 짐작됩니다.
백성들은 이 같은 억울함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했을까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이 사회 속에서.
이상백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