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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어린 넋을 위한 제기, 문희묘(文禧廟) 상준(象尊)과 희준(犧尊)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어린 넋을 위한 제기, 문희묘(文禧廟) 상준(象尊)과 희준(犧尊)

여기 코끼리와 소의 형상을 본떠 만든 유기그릇이 있습니다. 다소 통통한 몸에 짧은 네 다리로 서 있는 아담한 크기의 코끼리와 소는 어린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에 맞춤한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코끼리와 소의 등에 둥그런 뚜껑이 올려져 있고, 코끼리의 등을 길게 가로질러 둥근 고리 모양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릇입니다. 이 그릇들의 이름은 각각의 생김새 그대로 ‘상준(象尊)’과 ‘희준(犧尊)’, 조선 왕실에서 제례를 올릴 때 술을 담아 두던 술동이의 일종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상준과 희준 외에도 각기 다른 용도를 지닌 다양한 종류의 조선 왕실 제기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제사의 위격(位格)과 성격에 따라 다른 종류의 제수(祭需)를 올리고, 제수의 종류에 따라 다른 재질과 모양의 제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의 모든 신실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제기와, 특정 인물을 위한 개별 사당이나 왕릉 제례를 위한 제기들을 모두 합하면 그 수량이 상당한 규모에 이릅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같은 종류의 제기가 여러 점, 많게는 수십 점까지 소장되어 있는데 상준과 희준도 이러한 동종(同種) 다량(多量) 유물 가운데 일부입니다. 종묘든 개별 사당이든 제상에 공통적으로 올라가는 제수들이 있어서, 제례의 대상이 되는 조상신의 수만큼 제상을 갖추어 차리려면 제상에 올라가는 한 세트의 제기들이 여러 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제기들은 구체적인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제기 자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사용 장소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것들이 일부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상준과 희준에는 ‘文禧廟(문희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문희묘’는 정조(正祖, 1752~1800)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신주를 모신 사당의 이름으로, 이 제기들은 문효세자의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후궁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조와 효의왕후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후사를 얻기 위해 간택한 후궁들에게서도 자녀를 얻지 못했습니다. 왕실의 영구한 존속과 안정적인 왕위 승계를 상징하는 원자(元子)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리던 상황에서 마침내 아들을 얻은 정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실의 희망이었던 원자는 두 돌이 되기도 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1786년 홍역을 앓다 겨우 다섯 살 나이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정조는 세상을 떠난 세자에게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자의 무덤은 ‘효창묘(孝昌墓)’, 사당은 ‘문희묘’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세자의 사후 3년이 지난 1789년 문희묘를 짓고, 그동안 혼궁(魂宮, 장례를 마친 뒤 일정 기간 망자의 신위를 봉안하는 건물)에 모셨던 신위를 문희묘로 옮겨 봉안하였습니다.

문희묘를 짓고 신위를 봉안한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문희묘 영건청 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1790년 간행)에는 문희묘의 제례용 물품 목록이 실려 있습니다. 이 목록에 따르면 문희묘에는 뚜껑을 갖춘 상준과 희준이 각 2점씩 구비되어 있었는데, 국립고궁박물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문희묘 상준과 희준도 각 2점씩입니다. 


문희묘 상준象尊


문희묘 희준犧尊

『문희묘 영건청 등록』에는 각각의 물품들이 새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던 기존 물품을 가져다 구비한 것인지 구분하여 부기하였는데, 상준과 희준은 다른 제기들과 함께 문효세자의 혼궁에서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문희묘 상준과 희준은 1786년 문효세자 혼궁을 마련할 때 새로 제작한 것이고, 그것을 그대로 문희묘로 가져 와 계속해서 제례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문효세자의 상례(喪禮) 관련 기록인 『문효세자 빈궁혼궁도감 의궤(文孝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1786년 간행)에서 제기 주조(鑄造)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 국왕의 하교(下敎)에 따라 해당 제기가 비치될 사당 이름(廟號)과 묘소의 이름(墓號), 그리고 각각의 무게와 수량을 제기에 새겨 넣었다[魂宮墓所祭器因下敎分刻廟墓字標及斤兩數]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현존하는 문희묘 상준·희준에 새겨진 명문 내용은 이러한 의궤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문효세자 빈궁혼궁도감 의궤』 하권(下卷)의 삼방의궤 내용 중 ‘삼방주성소(三房鑄成所)’ 부분에 실려 있는 상준·희준 관련 내용과 현존하는 문희묘 상준·희준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아래의 표와 같습니다. 


의궤

구분

의궤 기록

명문 내용

상준

象尊 蓋具 二坐 合重十七斤十二兩

文禧廟 象尊 重八斤十四兩 蓋具 共二

희준

犧尊 蓋具 二坐 合重十六斤

文禧廟 犧尊 蓋具 重八斤 共二


문희묘 희준

의궤 기록과 명문 내용은 문희묘 상준과 희준이 뚜껑[蓋]을 갖춘 형태로 각각 2점씩 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상준의 경우 명문을 기준으로 2점 무게를 계산하면 16근 28냥(8근 14냥×2점)이 됩니다. 조선시대 도량형에 의하면 1근은 16냥이므로 16근 28냥은 의궤에 기록된 수치와 동일한 17근 12냥으로 계산됩니다. 이처럼 『문효세자 빈궁혼궁도감 의궤』의 기록과 문희묘 상준·희준에 새겨진 명문 내용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현존하는 제기들이 1786년 문효세자의 혼궁 설치 당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문희묘 영건청 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에 따르면 문희묘 제기고(祭器庫)와 전사청(典祀廳)에는 상준·희준을 포함하여 제례에 필요한 여러 가지 종류의 제기와 각종 집기들이 수십 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의궤의 기록대로라면 이 제기들은 현존하는 상준·희준에 보이는 것처럼 사용처와 수량, 무게 등이 새겨진 상태로 엄격하게 관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확인되는 문희묘 제기는 지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문희묘의 안타까운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문희묘는 한성부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의빈 성씨의 사당[의빈묘宜嬪廟] 바로 곁에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종 연간 이후 문효세자의 신위를 몇 차례 다른 곳으로 옮겨 모셨고, 1908년(융희 2) 7월 황실 제사 제도를 개정하면서 신위를 무덤 앞에 묻도록 함에 따라 문희묘는 훼철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제자리를 잃은 문희묘의 물품들은 아마도 어느 창고 속에 방치되거나 각기 새로운 사용처로 흩어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그 중 상준과 희준만이 우여곡절 끝에 종묘를 거쳐 박물관으로 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나마 상준 2점과 희준 2점이 흩어지지 않고 뚜껑을 갖춘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참으로 기특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많던 문희묘 제기고의 제기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종숙(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